김혜련: 현대성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검은 선의 발현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현대성(modernity)의 핵심은 무엇인가? 현대라는 시공은 어떻게 창출됐는가? 현대성을 추구하는 비전은 어떠한 기술매체와 예술매체를 통해 공유되고 성찰됐는가? 비평적 퍼스펙티브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방식은 시대변환의 각 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현대예술가들이 종종 망각하는 질문들이다.

 

만약, 현대예술을 통해 현대성의 체제를 (상징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무너뜨리고, 현대와 결별하는 새로운 시공을 창출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검증 불가능한 실험 혹은 모험을 감당할 예술가는 몇이나 될까? 현대예술은 지금과 같은 양태로 지속되는 것이 옳은가? 다중의 리얼리티가 납작한 타임라인 속에서 서로 상충하며 마구 흘러내리는 오늘의 기이한 상황 속에서, 현대예술은 현대적인 존재이기나 한가? 이미 주술적 존재, 스마트폰 사용자 각각에게 맞춰진 망상적 리얼리티의 실재성에 봉사하는 21세기의 의사-토템(pseudo-totem)이 되고 만 것 아닌가?

 

_ 예술가 김혜련의 경우

 

화가 김혜련(1964-)은 현대성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위대한 도전에 나선 예술가다. 현대 이전의 한반도에 펼쳐졌던 각 시대에 제작된 정념정형의 오브제들을 연결고리이자 관문으로 삼아, 고대의 미분된 묘선(描線)과 선각(線刻)이 이끄는 인간 정신의 남상축(濫觴軸)으로 전진한다. 고인돌에 새겨진 그림들을 조사해 그 조형과 그에 깃든 정념들을 함께 되새기고, 그로부터 재생되는 어떤 시각에 주파수를 맞춤으로써, 그는 기존의 한계점들을 뛰어넘었다. 산업 시대인의 관점에 봉사하는 전통을 답습하는 예술의 한계를, 모더니즘 타파에 눈이 멀어 의사-근대성의 전통을 직조하는 대안적 시도들의 한계를, 민족주의의 필터로 오분류되는 전통을 갈고 다듬는 부류의 의사-장인주의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2014년부터 진행해온 스터디 작업들을 통해, 김혜련은 자신만의 므네모시네 아틀라스를 작성해왔다. (대체로 한반도 남부 각 지역의 시대별 인공조형물들을 조사-탐구하고 묘선과 선각의 길을 추적-의태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한반도나 한국어 문화권에 국한하지 않는다.) 화가는 그가 주목하는 각 유물들의 그림들에서 선을 취해 모양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선긋기의 신체 행위를 야기하는 시각과, 시각과 그리기 행위 모두를 관제하는 동시에 그를 통해 재창출되는 정신, 반복적 그리기 행위를 통해 신체에 담는다. 그렇게 실천 행위 모델을 통해 수집-축적된 다종다양의 시각과 행위와 정신은, 다시 머릿속 상상계에서 하나의 면--점으로 환원된다. 면이 되는 점과 점이 되는 면을 부리는 그의 선들, 즉 확산적 탐구를 통해 환원되는 선들은, 새로운 해석적/창조적 힘을 발휘하는 단계에 이르는 중이다. 김혜련 특유의 확산적 탐구를 통해 환원되는 선, 탐구 대상을 기존의 질서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그 뼈대를 해체한다. 한데, 재구성의 과정에서 본디 탐구 대상에 담겨 있던 어떤 고대적 성격을 추출-강화시킨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2020년의 예술과 암호-고조선연작에서, 화가는 미지의 퇴적층을 파내며, 잊힌 조형성을 복원하는 단계에 서 있었다. 한데, 2022년의 개인전 그림을 쓰다: 훈민정음에서 그는 복원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의 이상향을 조형해온 기존의 조형 질서들을 해체하고 종합함으로써, 그에 담겨 있던 핵심을 재조형해놓고야 말았다. 훈민정음의 세계를 구성하는 판각본들과 여러 서예 기록물들을 세계를 타고 흐르는 고대적 가치관/조형관을 발견해, 새로운 암호적/주술적 긋기-그림의 원시적/초현대적 훈민정음 세계를 창출해낸 것이다.

 

김혜련의 선을 김호득의 선과 비교해 봐도 흥미롭다. 김호득의 붓에서 나오는 선이 이미지로 독해되는 것을 용인하는 추상적 선묘 행위의 흥취를 특징으로 하는, 동시대적이고 도가적인 선이라면, 김혜련의 선은 대상의 원류를 보고 그 시간축에 잠들어있던 연결고리를 그어내는, 즉 대상을 죽여서 원현상을 되살리는 제사장의 칼과 같은 선이기에, 비동시대적이고 종교적인 성격마저 띤다. 그래서 김혜련의 필선에는 그래서 기이한 골격(骨格)의 멋이 깃들기도 한다.

 

같은 말을 시적으로 함축해놓자면, 다음과 같다: “고대의 정신에 주파수를 맞추는 필선의 울림과, 심안에 의지하는 필획의 뼈대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우주 나무의 길을 찾고 또 찾는다.”

 

고대를 응시하는 오늘의 눈을 통해 아무도 요구한 적이 없는 내일을 그어내는 실천엔, 어떤 문화사적 예술사적 의의가 있을까? (김혜련의 선이 시간을 분절하는 동시에 재통합해내는 경향을 띤다는 점은, 언제 생각해도 흥미롭다.)

 

현대성의 체제로 창출할 수 있는 미래상과 그를 통해 구현해내는 현재가 되는 근미래엔 한계가 있으니, 이제 우리는 시간의 축을 재사고하고 재창조해야 하는 단계에 봉착해 있다. 참된 돌파 지점은 과학기술자들이 창출해낸다고도 하지만, 예술가나 예술가적 존재들의 기여도 무시할 것은 못된다.

 

_ (현대)미술과 창조적 원천으로서의 고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도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유물을 통해 고대를 탐구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회화 세계그림을 보는 방식과 세상을 보고 읽는 방식 모두의 혁신을 요구했던를 창조해냈다. 일안원근법적 재현의 한계를 벗어나는 현상학적/경험주의적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폴 세잔은 루벤스와 푸생을 참조해 창조적 고대의 재발견에 동참했고, 위대한 대수욕도의 미완-세계에 가 닿을 수 있었다. 세잔에게 자극을 받은 마티스가 삶의 기쁨(Le bonheur de vivre)에서 선사시대 벽화를 참조하고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통해 그를 다시 반박하고 나선 역사는 더 잘 알려져 있다. , 현대미술의 거장들도 늘 새로운 현대성의 한계 지점에서 고대를 찾고 또 그로부터 아무도 요청한 적이 없는 미래를 추출하고 또 구현해냈다.

 

민족주의적 전통 탐구의 프로젝트에 자리를 내어주거나 혹은 그 흐름에 병합되고 말았지만, 통일신라의 유적이나 고구려 고분의 벽화 등이 한때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고대적 영감의 원천으로 간주됐던 적이 있다. 폐허 동인이 상상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도, 조각가 김복진이 조선미의 현대적 재해석-창출의 기준점으로 삼았던 것도,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이었다.

 

(이중섭이 학창 시절 고구려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바라보다 잠에 빠지곤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고구려가 고대적 영감의 원천으로 지목된 경우는 흔치 않다. 북조선이 고구려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92년의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항의하기 위한 차원이었고, 19932월 출범한 김영삼의 문민정부도 뒤질세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하게 됐더랬다. 대표적인 기획이, 19931118-1226일의 ! 고구려전이었다. 본디 중국 집안의 고구려 고분 벽화 사진전이었지만, 미술인과 대중 모두 고구려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투사했고, 블록버스터 전시와 사회 현상이 됐다. 이러한 역사 회복의 열망은, 이후 클럽 고구려”[19965]) 등장 같은 웃지 못 할 사회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사회 현상이 유의미한 성취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쉽게 고쳐 말해, 김복진의 경우는, 통일신라시기의 불상을 기준점 삼아, 르네상스적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조각가였다. 따라서, 1935년의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 공모불모 일섭 스님 등 총 5인이 경쟁을 벌였던에서 그가 당선자의 영예를 거머쥐었던 일은, 그리고 38(11.82m)의 불상이 상당히 현대적 성격을 띠었던 점은, 신라의 폐허로부터 새로운 민족적 중흥의 미래를 보고자했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통일신라와 일부 유물에서 발견되는 균제미를 민족적 자존심의 기준점으로 사고하는 경향은, 한국 전쟁 이후 남북한 미술 양쪽에 공히 영향을 미쳤다. 월북 미술인 이여성(1901-?)의 경우엔 통일신라의 균제미가 고려와 조선에서 퇴보하는 이유를 봉건 시대의 한계로 지목했다가, 식민 사관에 부합하는 주장이라고 비난을 받고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지만, 그러한 유물론적 역사관을 미술사에 적용한 것은, 윤희순(1902-1947)이나 안석주(1901-1950) 등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선 통일신라와 일부 유물에서 발견되는 균제미를 칭송하는 경향이, 이승만 정권의 몰락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 이병철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되기도 했지만, 그러한 편향은 1970년대에 보다 폭넓은 전통에 주목하는 흐름이 대두하며 빠르게 극복됐다.

 

_ 한국의 전통 탐구나 고대 탐구 경향에 내재됐던 한계

 

하면,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전통 탐구나 고대 탐구는 어떤 양상을 띠었는가?

 

근대화에 앞장선 개화 중인 집안의 자제 고희동(1886-1965)이 일본 유학을 통해 양화기법을 습득한 이후, 위로는 역시 개화 중인 집안의 자제로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서화수집-감식가 오세창(1864-1953), 아래로는 대부호의 아들이자 문화재 수집가인 전형필(1906-1962) 등과 교유하며 서화골동의 세계에 집착하는 가운데, 전통적 서화의 영역으로 복귀해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근대화된/현대화된 동양화를 시도했던 일이나, 김규진(1868-1933)이 사진술을 익히고 실행함으로써 사진적 리얼리티 이후의 전통 서화를 고민하고자 애쓰며 여러 후진을 양성했던 일, 그리고 소위 향토색 탐구가 유행하고 곧 이어 문명적 폐허로부터 새로이 출발하는 민족(주의)적 서사를 우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형성됐던 일, 과거의 어떤 신화적/가상적 시공을 때 묻지 않은 아르카디아(이상향)로 표현하려는 강박이 등장했던 일, 해방의 서사에 알리바이를 부여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 등 근로인민대중을 고통 받는 타자인 동시에 토착적 힘을 배태한 혁명 주도 계급으로 묘사하고자 애썼던 일, 대다수의 화가가 근대적/현대적 미술가로서의 제 정체성을 묻는 자화상을 적어도 한 점씩은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일, 모두 외래적 시각성의 토착화라는 미완의 과제(종종 토착성에서 외래적 시각성에 준하는 무엇을 찾아 실현해내는 프로젝트로 전화됐던)를 하루빨리 완수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린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서구의 리얼리즘 전통을 학습하고 체화해 그것에 상응하는 시각성 체제를 조선 혹은 동아에 구현하겠다는 욕망은 강렬했지만, 그것을 토착화해놓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세대에겐 더욱 이어받기 어려운 모순적 존재, 결함이 또렷이 드러나는 존재, 비판을 통해 극복의 대상으로 지목당하고 그 성취를 부정당하기 십상인 존재가 됐다. 그러한 세대적 부정과 재부정의 양상은, 뒤늦게 서구의 원근법적 세계관과 유화 기법 등을 받아들인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서구의 리얼리즘에 화답해 신일본화를 주창한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3-1913)과 그를 추종해 특유의 몽롱체 화풍을 발전시킨 화가들은, ‘일본적인 것은 평면적인 것이다라는 문제의식을 앞세운 후대에 의해 역사적 성취를 간단히 부정당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조선에서 전개된 조선화 논쟁과 그를 통한 숙청의 과정은, 그러한 부정의 변증법이 어떠한 극단에 치달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줬다. 1953년 휴전 이후, 한때 소비에트 스타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교육이 실시되는가 싶었지만, 김용준(1904-1967)과 정종여(1914-1984) 등의 전통주의자 미술인들에 의해 친러시아파와 친중국파, 그리고 남로당계 미술인들이 차례로 숙청됐고, 섣부르게 서구적 리얼리즘에 의거해 변증법적 한국미술사를 주창했던 이여성과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이쾌대(1913-1965)의 경우, 주요 직책에서 제거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비극적 최후를 맞아야 했다. (식민사관에 부분적으로 부합하는 조선 미술의 퇴화를 이야기한 것은, 정녕 죽을 죄였나?) 반면,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으로서, 서화의 전통과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적절히 융합해보고자 했던 김용준은, 1960년대 중반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을 잘 읽지 못했던듯하고, 일설에 의하면, 196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동지인 정종여에게 밀려날 때, 김용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짜감치 카프의 교조주의를 비판했던 김용준은, 1930년 뜻을 함께 하는 작가들을 모아 백만양화회를 조직함으로써 자신의 전위미술론을 실체화했더랬다. 당시 김용준은 서구의 현대예술이 동양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봤는데, 이러한 사관은 심영섭 등의 아세아주의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의 전통미술을 연구해 새로운 민족적 지향점을 창출해야 한다는 창조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비전이었다. 하면, 어쩌다가 그의 전통주의에 입각한 전위미술론 혹은 전통주의에 입각한 형식주의적 모더니즘론은, 북조선의 주체미술의 탄생에 기여하고 숙청을 통해 기각되고 말살 당하게 됐을까? 1930년대 중후반 김용준의 비전에 영향을 받아 시도됐던 일련의 조선적 유화들은, 주체미술과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 것일까? 그들이 꿈꿨던 새로운 현실은 각각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서구의 리얼리즘에 상응하는 것이 구현되면, 그를 통해 형성-강화된 민족주의적 잣대를 따르는 후속 세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비판하고 부정하게 되는 경향이 강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패턴은, 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에서도 유사한 양태로 반복됐다. 서구(혹은 근대화한/현대화한 일본)의 모더니즘에 상응하는 것이 구현되면, 그것은 서구(혹은 근대화한/현대화한 일본)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결과로 비판받았고, 결국 매 주요 변곡점에서 모더니즘은 전통(종종 지역주의나 지역색)과 결합하는 양상을 띠었다. 예컨대, 한국식 앵포르멜 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과 맞물리며 고색추상의 경향을 띠었고, 재차 그것은 1972년의 유신 이후 내면에 침잠하는 의사-선비적 수신론(修身論)과 결합하며 보수화의 길을 걷더니, 1975년에 이르면 식민기 조선미론의 전후 업데이트 버전으로 독해되는 백색/단색조 담론으로 확장하는 양태를 드러내게 된다.

반면, 1979년 조직된 현실과 발언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그리고 1982년 결성된 두렁임술년등에 의해 전개된 민족민중미술운동은, 전후의 추상미술에 대비되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양태로 출발해, 반외세적 시각을 담은 민족/민중-역사화(해방 40주년이었던 1985, 시민사회와 대학사회로부터 상당한 반향을 얻었던)와 민중-전통에 의거한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대형 걸개그림의 제작 등으로 다각화했다. 한데, 1987/88년에 정점에 달했던 민족민중미술운동은, 이념적으로는 분명한 몇몇 계열을 통해 전개됐을지 몰라도, 양식적으로는 다양한(때로 내용에 모순이 되는) 시도를 포괄하는 불분명한 것이기도 했다. 국내의 투쟁적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큰 세계미술사의 차원에서 보자면, 비평적 이미지의 동시다발적 귀환은, 탈식민 국가의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전투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리 되지는 않았지만.

 

과연, ‘리얼한 것’(실재성: the real)을 추구하려는 충동과, ‘모던한 것’(the modern), 혹은 모더니티(modernity)를 추구하려는 충동은,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 노릇을 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시공을 분할하며 상충하고 또 뒤엉키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시대성은, 그 두 가지가 뒤엉킨 뿌리에서 피어난 꽃이었지만, 여전히 한국현대미술사 연구의 대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진영의 상호 부정적 반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통합적 시각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즉 한국이라는 국가주의가 강제하는 민족주의 사관에서 탈피하는 시각으로 지역의 미술사를 연구하고 논하려면, 장차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답은 하나다. 오늘을 규정하는 전통관과 미래관 양자를 갱신하는 것.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일이 필수다.

 

_ 아시아 공통의 고대를 재발견하고 재탐구하는 미완의 과제

 

그렇다면, 아시아 공통의 고대를 재발견하고 재탐구해 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내고야 마는 미술가는 왜 나오지 못했을까?

 

주지하다시피, 고유섭 등의 조선미론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야나기 무네요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동아시아의 민예품을 고루 수집하고 연구해,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동아시아의 미래를 창출하는 현대적 미술공예운동을 벌이기를 꿈꿨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아름다움에 빠져 조선민예품을 수집했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 왜곡이다. 일본민예관에 소장된 조선 민예품 등의 수준이 높지 않다며 그의 안목을 폄하하는 연구자도 있는데, 역시 오해다. 애초에 그는 소위 명품을 수집할 생각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했던 보통의 물건들에서 보통 이상의 미감을 찾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4년 수집품을 한데 모아 조선민예관을 설립한 뒤, 쇼와 시대(1926-1989)에 접어들자 일본민예관을 설립하는 일에 몰두해 1936년 개관에 성공하는 과정은, 시대정신의 숨 가쁜 변화에 조응한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평가할 때면, “조선을 연약하고 수동적인 식민지라는 타자로 바라봄으로써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일조한 동양주의자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박계리 등이 박서보의 단색화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동양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전후의 한국인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읽어내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해왔다. 하면, 그의 성취는 한국인이 공개적으로 이어받을 수 없는 유산일까? 야나기 무네요시가 추진한 민예운동은 당대에 잘 성취되지 않았지만, 실패로 멈추지 않았다.

 

일본민예관장으로 봉직하다 201112월 서거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들 야나기 소리(柳宗理, 19152011)는 부친의 유업을 이어 일본의 1세대 산업디자이너로서 큰 업적을 세웠고, 그의 사후 민예관의 관장으로 선임된 인물은, 놀랍게도 현재 일본의 현대디자인계를 대표하는 나오토 후카사와(深澤直人, 1956-)였다. 나오토 후카사와의 디자인 방법론 수퍼 노멀, 일상적 사물과 제품에서 20세기 굿디자인에 버금가는 미덕을 찾아 따르자는 실천 사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정신을 그대로 빼닮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정신을 계승한 디자이너는 나오토 후카사와 한 명이 아니다. 나오토 후카사와에게 거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존재로서, 동년배 디자이너 하라 켄야(原硏哉, Kenya Hara, 1958~)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02년부터 무인양품(MUJI)’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해온 하라 켄야는 제 저술 디자인의 디자인(2007), ()(2008) 등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陰翳礼讃)(1933)을 주된 레퍼런스처럼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우환이나 나카하라 유스케의 의사-동양주의를 통한 타자의 의태라는 전략을 꽤 열심히 참조한 티가 난다.

 

모노하와 단색화가 미니멀리즘을 동양화하기 위해 의사-동양주의의 논법을 내세워 현존/초월의 양의적(兩義的) 인식-장을 제시-창출해냈듯, 하라 켄야는 비어있음의 을 제시해 모노크롬의 디자인을 구현했다. 한데, 무인양품의 세계가 창출하는 것은 새로이 갱신된 현대적인 현실이 아닌가. 무인양품의 소비자들에게 구현되는 모종의 리얼한 것에서 조선민예의 흔적을 느낀다면, 과장이 될까? 왜 한국의 디자이너들 가운데,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등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고, 또 그에 성공한 경우를 찾기는 어려울까?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한 한창기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을 전후 한국사회에 걸맞게 갱신해낸 인물이었다. 그의 창조적 저널리즘을 통해서, 새로운 글쓰기, 새로운 에디터십, 새로운 사진미학, 새로운 편집디자인, 새로운 인테리어, 새로운 미술비평, 새로운 옹기 문화, 새로운 여성상, 새로운 한국의 인문지리학 등이 추구됐다. 현대적 미감의 차원에서, 동시대에 그에 필적할만한 견인차 노릇을 한 사람은, 건축가 김수근 한 명이었다. 하면, 한창기가 창출하기를 꿈꿨던 토속적 현대성은, 혹은 김수근이 추구했던 선비적/유교적 현대성은, 오늘날 한국인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을까? 그들의 성과를 계승하는 동시에 극복하고자 한다면, 어떤 노력을 기울어야 좋을까?

 

_ 하나의 길이 되는 김혜련; 고대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우리를 해방으로 인도하는

 

나는 화가 김혜련을 한국성 탐구를 통해 한국성의 한계를 초극하는 단계에 도달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거장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예술가로서 그는, 하나의 확산 가능한, 수행적 실천의 모델이 된다. 그는 고대를 가설적 기준점으로 삼아, 각 지역의 각 시대별 유물을 관문으로 삼는다. 오늘과 고대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지목된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고대와 마주하고, 그 조우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보도록 강제된다.

 

반면, 조각가 권진규는 1950년대 중반에 통일신라의 유물과 폐허를 상상력의 원점으로 삼는 구식 편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더랬다. 보살입상(1955)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형식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미감으로는 그에서 벗어나 모쿠지키불(木喰佛)과 같은 민예적 색채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국보 하니와를 참조해, 테라코타 조각이 또 다른 고대로의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는 그리스 고대미술의 아르카익한 성격을 한일 복합의 언어를 통해 현대화하고자 했고, 아르카익한 고색지향(古色志向)의 균제미를 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엔 민족주의 세계관이 강화되는 국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선택한 최후의 승부수는 죽음. 그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죽을 수 있듯이 나는 나의 작품을 위해서 죽겠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나드는 다중 전통의 혼융을 통해 새로운 미래지향성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늘 실패해왔다. 소위 아시아주의자였던 백남순(1904-1994)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낙원(1937)이 지금에야 상찬을 받지만, 작가의 생전엔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지금도 북조선 미술계는 임용련 백남순 부부를 맹비난하고 있다.)

 

한데, 김혜련은 포스트-민족주의자이자 포스트-아시아주의자로서의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한반도의 전통을 통해 고대로 가는 길을 찾고, 고대의 상호연결성을 바탕으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가 탐험하는 고대의 상호연결성은, 내일의 인터-아시아(inter-Asia)를 위한 공통의 문화 자산이 될 운명이다. 따라서, 머잖아 그는, 아랫세대의 화가들에게 대안적/필연적 시공이자 영감의 원천으로서 발굴/발견되고야 말리라 확신한다. ///

 

추신) 김혜련이 우리를 고대의 상호연결성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논점이 두드러진다. 바로 조선미론 한국미론의 중핵? 이루는 가치의 재해석 가능성이다.

 

조선인 가운데 최초로 현대적 미술사 연구방법론에 따라 연구를 전개했던 고유섭은, 1940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조선미술문화의 몇낱 성격1941춘추에 기고한 조선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에서, 조선미술의 특성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등으로 설명했다.

 

큰 질문을 던져보자. 19세기 후반 이래의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등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해낸 현대미술가는 누구일까?

 

고유섭의 이러한 조선미론은, 김용준에게 영향을 미쳤다. 김용준은 연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김환기와 교유하며 그를 수화소노인이라고 불렀다. 김환기? 김용준의 영향에 따라, 백자를 수집하고 달항아리라고 불렀으며, 진화하는 제 작업 세계를 지탱하는 미감의 우물로 삼았다. 그 결과,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등의 가치를 조선적인 유화로 구현해내는데 성공한 첫 현대화가는, 김환기가 됐다. 김환기에 필적하는 존재는 이응노 딱 한 명뿐인데, 이응노는 무계획의 계획이라는 잣대 앞에서 다소 취약함을 드러냈다. (오히려 이응노의 조각에서는 무계획의 계획이 멋지게 구현되곤 했다.)

 

하면, 전후 세대의 리얼리즘 화가 가운데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등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해낸 현대미술가는 누구일까?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이라는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만, 일단 떠오르는 미술가는 오윤이다. 하지만,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등의 가치를 고루 구현하고 있는 미술가는 서용선이다. 그가 신표현주의적 한국화를 통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왔다는 점에 주목하면, 다시 표현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했던 김용준이 떠오른다.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볼 때, 서용선은 민중미술보다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간 면이 있다. 민중미술가들을 추동했던 리얼한 것의 원형은, 서용선을 추동해온 리얼한 것의 원형과 어디까지 같고 또 다른 것이었을까?

 

문제는, 앞서 언급한 미술가들이 모두,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의 가치를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범주 내에서 구현하거나, 아니라고 해도, 그 자체를 재정의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고대로 연결되는 무수한 구멍들을 통해, 인류 공통의 상호 연결성의 시공을 창출하는 김혜련이,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의 가치를 구현해내는 장면은, 거의 자동적으로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제시한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의 가치는, 근역(무궁화의 땅) 혹은 조선/한국만의 것이 아니라, 고대 인류 공통의 자산이자 특질인 것은 아닌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은 고대적 정신과 행위의 기본 패턴인 것은 아닌가?

 

추신2) 어려서부터 오랜 역사가 깃든 곳이나 사물을 마주하게 되면, 늘 고대의 위대한 정령들에게 기도하곤 했다. 내가 그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겠노라고. 하니 보잘것없는 내게 힘과 운을 보태 달라고.

 

김혜련 화백의 파주 작업실에서 나는 자라나는 우주목을 봤다. 돌아오는 길에, 시각뇌-마음에 담긴 그 우주목을 향해/통해 기원의 노래를 불렀다. 한반도 문화를 관통해온 구수한 큰 맛’(현대화를 거부해온 원시적 품위)으로 온 인류를 아우르는 우주목의 대안적 질서를 재발견하고 그 거듭남의 시공을 함께/따로 나누는 사업에, 생명 창조에 가까운 힘을 허락해 달라고.

 

추신) 개인전 예술과 암호, 마한의 새(2022315-612,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삼각산금암미술관)에서 작가는, 마한백제문화권에서 발굴되는 새발무늬토기와 관련 유적을 추적-고찰하고, 그로부터 추출한 추상 행위를 다시 한글 탐구와 연결 짓는다. 그러한 연결성의 논리는, 다뉴세문경을 추적-고찰한 연작이나, 전라남도 나주시 운곡동, 전라북도 임실군 가덕리 등지의 고대 암각화를 바탕으로 한 작업들과 다시 성좌를 이룬다. 이러한 삼각 성좌의 성운 속에서, 다중 함의를 품은 기호가 된 새발자국들은, 관람객의 정신세계를 모종의 춤으로 이끈다.

 

화살표 같은 기호의 안내에 따라 시각뇌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보면, 홀린 나/우리를 통해, 새가 된 고대인들이 오늘에 내려앉는다. 우리에게 날개가 달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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