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ttitude of HK’s ‘Open’ Painting - Completeness in its Unfixity


“Heryun Kim is an artist who lays bare the face of a painting. Her confidence is rooted in her spontaneous character, never trying to hide or fabricate her identity. There lies a persuasive and touching power, just as that of a mature woman showing herself as she is. The paintings of Heryun Kim deviates from what is anticipated, and from the settled paradigm. This challenge and expansion the artist attempts is so commanding that it almost seems like a rebellion. Yet her paintings still reveal a hint of soft, sophisticated feelings.”

– Young-baek Chun, professor of the Fine Arts Department, Hongik University


김혜련 회화의 열린’ 태도고정되지 않은 완전함


전 영 백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김혜련의 그림은 일부러못 그린 그림이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어눌하게 표현하듯, 한번 뒤트는 고수(高手)의 태도가 있다. 매력이란, 예기치 못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법이다. 김혜련 회화는 그림에 대한 예상치를 비껴나고 고정된 틀을 벗어난다. 게다가 그 도전과 확장은 하도 당당해서 거의 반항적이다. 그런데 의외의 여리고 섬세한 감수성이 화면을 채운다.

 

조형적 견고함과 색채의 감수성을 동시에 가진 회화는 보기 힘들다. 어깨에 힘을 빼는데도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권위가 어디 쉽겠는가. 김혜련의 작업에서 보는 역설이 이런 식이다. 강력하고 고집스런 선이 한없이 예민한 색을 이끈다. 유화 재료의 물성과 중층의 붓질로 사물의 윤곽선을 어두움에 녹이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으면서 농축된 이미지가 가져오는 화면의 밀도는 가슴을 누른다. 굵고 확고한 선과 예민한 색채가 회화면에 동요를 일으키는데, 그 움직임이 여간 자유롭지 않다. 화면에서 노는 사유의 궤적이 고스란히 붓질에 실려 있다. 내면의 움직임을 가시화한 형태, 심상의 뉘앙스를 담은 미묘한 색채는 전체적으로 절제된 표면에 아스라이 걸려있다.

 

김혜련 회화의 핵심은 표현주의와 인상주의, 심상의 표현과 자연의 포착, 또한 서양과 동양 사이의 절묘한 균형에 있다. 후자를 보다 정확히 말해, 동양과 서양 사이의 전이(轉移)가 자연스러워 어느 한쪽으로 규명하기 어렵다 해야 할 것이다. 유화물감에 오일의 함유량을 자유자재로 하는데, 오일 적은 물감을 두껍게 발라 표면질감을 거칠게 표현하고, 안료에 오일을 많이 섞어 그 색채가 흐르고 번지게 하기도 한다. 후자는 동양화 채색의 농담 표현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의 유화 드로잉은 먹 선의 획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먹으로 그린 드로잉은 그 필선의 방식이 전통적이지 않아 유화에서 보는 개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선은 거침없는 한 획의 일필휘지라기보다 차라리 힘주어 새겨 넣는 각인(刻印)이다. 그리고 번지지 않는 유화로 몰골법을 구사한다. 이런 성향은 오래된 관심의 발현이다. 그는 1990년부터 2001 초까지 10년 동안 독일에서 체류했는데, 베를린 예술대학 재학 시절부터 재미삼아 먹과 한지를 사용하였고, 작업에서 유화와 먹 드로잉을 병행하였다. ‘동양화 같은 유화를 그리고 싶다던 작가의 소망은 어느 새 이루어져 있다. 힘 있는 필선에 기운생동이, 과감한 붓질에는 골법용필이 배어 있으니.

 

화가의 붓질이 화면에 남기는 은 색채의 힘줄이 되어 화면을 단단히 잡고 있다. 실제로 그의 회화는 안료의 물성과 표면의 질감이 신체를 닮았는데, 2010년부터 도입한 그림면의 스티치(stitch)는 이를 확인해 주는 듯하다. 피부에 난 상처를 꿰매듯 회화 면을 두꺼운 면사나 구리철로 봉합하는 제스처는 관습을 뛰어넘는 과감한 시도이다. 물적(物的) 요소의 직접적 활용은 오브제의 시각적 환영보다 물질성을 부각시키는 포스트모던의 탈환영(disillusionment)을 체험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질성의 조합으로 말미암아 회화언어를 확장시킨다. 그는 회화 면을 자르고 스티치할 뿐 아니라, 한 화면에 다른 면을 콜라주하거나 덧붙이기도 한다.

 

이렇듯 그림면에 변화를 가하는 것뿐 아니라 작가는 회화의 구조 자체를 변경한다. 다시 말해, 단일 화면의 구조를 깨고 이를 여러 화면들로 확장시킨다. 캔버스를 복수로 구성하는 것은 서양의 전통적인 삼면화를 우선 떠올릴 수 있다. 현대에서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김혜련의 경우, 그 구조가 다름 아닌 병풍을 닮아 있다. 각각의 단위 그림이 독립적이면서 그 연장은 개념적으로 무한하다. 화면을 구성하는 미학적 측면에서만 볼 때, 그 구성의 완성이란 미리 전제된 것이 아니다. 창의력의 단초는 병풍 뿐 아니라 수평으로 펼치는 동양의 두루마리 구조에서 가져왔음이 확실하다. 화면의 최종 개수는 작가의 맘에 달려 있다. 구상하는 이미지의 한정이란 자의적이고, 회화는 전적으로 열린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김혜련의 회화는 한 화면에 한 이미지라는 서양화의 성스런 공식을 깬 셈이다. 하나로 완성된 이미지는 통합된 사유를 뜻하는 것이고 이가 서양화의 기본 전제다. 삼면화든 사면화든 캔버스의 복수 구성은 애초부터 전체를 상정하고 그 통합성을 위해 채워나가는 것이다. 전체 없는 부분이란 있을 수 없다. 전체를 의식한 상태에서 부분을 떠올리기에, 그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세계를 형성하는 주체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동양적 사유에서는 전체가 부분의 합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 개인이 사회일 수 있고, 개별주체가 세계이며 소우주(小宇宙)일 수 있다. 김혜련의 회화 연작은 각각의 캔버스가 전체를 위한 구성을 의식하지 않는다. 작가는 개수를 미리 정하지 않고 이끌리는 대로 작업을 하면서 마무리를 결정한다. 개체는 고유하게 존재하고 그 조합은 자유자재이다. 하나로도 완전하고, 열 개, 삼십 개라도 역시 그럴 수 있으니, 어느 정도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완전성은 하나에도, 혹은 수십 개에도 가능한 것이다. ‘완전성(completeness)’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고정되거나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김혜련 회화의 열린 태도와 그 완전성을 보는 근거이다.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표현의 조합은 자칫 인위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음새를 가리고 간극을 메우려 할수록 더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런데 김혜련의 작업은 독일 표현주의 혹은 인상주의 추상 등 서양회화의 주류에 제대로 편승하면서도 동양 미학의 중심을 잡고 있다. 특히 한국적 정서의 발현이 무척 자연스럽다. 그것은 작가가 차이를 잇는 매듭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렇듯 솔직한 태도는 민낯을 그대로 보이는 성숙한 여인의 자신감처럼 설득력과 감동을 지닌다. 김혜련은 그림의 민낯을 드러내는 화가이다. 그의 당찬 자신감은 그가 감추거나 꾸미려 하지 않는다는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작가는 캔버스의 옆구리를 그대로 내 보일 뿐 아니라 거기에 못질을 해댄다. 그림의 프레임은 어찌하면 가릴까, 어떤 방식으로 해야 전면(façade)의 이미지와 매끈하게 연결시켜 미적 환영을 깨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부분이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면도하지 않은 겨드랑이를 그대로 내보인 듯 관람자의 충격은 크다. 이미지의 환영은 깨지고 몰입하려던 미적 비젼은 망가지는 것이다. 나무틀이며 캔버스 천이라는 물질적 조건을 환기시키는 작가의 과감한 제스처는 관람자의 인식에 내가 보는 것은 그림이다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이다. 아니면,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 프랑크 스탤라(Frank Stella)의 미니멀리즘의 쿨한 태도를 목격한다고나 할까. 작가는 이 민감한 부분을 대놓고 드러내고, 그것도 모질라 그 나무 프레임에 못을 박았다. 침술가가 신체의 혈을 찾아 일침을 놓듯, 땋아 올린 여인의 머리에 비녀를 지르고 머리핀을 꽂듯, 작가는 캔버스를 못으로 질러두었다. 그리고는 머리에 족두리를 씌우듯, 프레임 없는 캔버스에 완자를 얹혀 걸어 둔 것이다. ‘그림은 벽에 거는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이 그림이 2차원의 평면이라는 서구 모더니즘의 명제에 비등한 것이라 볼 때, 김혜련의 주제의식은 액자를 벽에 거는 ‘2차원의 행위를 다룬다.

 

이렇듯 그림이란 무엇인가가 김혜련 회화의 변치 않는 관건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그림으로 부조도 만들고 설치도 한다. 그림의 프레임과 캔버스를 이어 만든 구조물인 회화-설치(painting-installation)’도 그림의 근본에 천착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매체의 구조는 동서양을 통틀어 이제껏 선례가 없다. <용궁>(2013)이나 <>(2013)에서 보듯 어설프게 조성된 구조물은 이 작가의 특징대로 짐짓 어눌하고 의도적으로 엉뚱하다. 이전부터 그려왔던 모란과 풍경,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동과 흐트러진 천이 각각의 프레임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사각의 조형물로 구성돼 있다.

 

그의 회화-설치는 그 모뉴멘털한 형태에 맞지 않게 연약(fragile)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기념비는 이를 구성한 꽃과 바다와 찢긴 천 조각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권위를 자학하며 연민을 품는다. 그리고 그 내용에 여성과 모성이 깃들어 있다. 모란이 상징하는 박경리의 문학과 한국적 정서, 색동과 꽃신이 끌어오는 여성의 미감, 그리고 얇은 천이 상징하는 성적 의미 등. 그런데 그의 작업이 결코 여성적이라 한정 지을 수 없다. 사각형의 기념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요소들은 당당하고, 도전적이고, 공격적이다. 김혜련 작업은 드로잉의 화력과 색채의 강렬함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못을 친다거나 스티치로 천을 꿰뚫는 것 등에서 강력한 힘의 개입이 초지일관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남성적이라 부를 필요는 없으며, 섬세한 감성과 역동적 힘의 양자를 모두 잡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혜련 회화의 근본은 드로잉이다. “사물을 표현할 때 나만의 윤곽선을 찾아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말한 작가이다. 그런데 그의 드로잉은 윤곽선을 넘어선다. 그의 드로잉은 형태와 색채가 섞이는 기호의 장(site)이다. 다시 말해, 색채가 되는 형태와, 형태가 되는 색채를 목격하는 매개의 장이다. 드로잉의 진행에서 사물의 형태는 색을 입고 형태와 색채 사이의 구분이 지워진다. 그 융합은 싸우듯 격렬하게, 또는 애무하듯 부드럽게 이뤄지는데 그 다양함을 지닌 드로잉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지(擔持)한 듯하다.

 

사물이 이미지로 화면에 드러나게 되는 과정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없다. 그것은 대상 자체의 표상이라기보다 작가자신이 지닌 심상(心象)의 표현이기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작가의 시각과 체험에 따라 수없이 많은 이미지가 가능하다. 이번 전시에 보듯, 작가는 하나의 작은 그릇을 갖고도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심상을 체화한 눈이 보는 사물은 그저 하나의 물체가 아니다. 그건 작가의 작업실일 수도, 또 한없이 확장되어 마침내 소우주일 수도 있다. 때문에 하나의 물건이 이 작가의 오브제가 될 때, 축복이 따로 없다. 김혜련의 신발, 포도, 꽃 그리고 그릇은 여느 작업실에 놓인 그 부류와 차원이 다르다. 열매 하나의 존재에, 일상 사물 한 개에 쏟아 부은 애증(愛憎)의 정도가 보통을 넘으니 말이다. 그는 신발에 꽂히면반년 정도는 신발만 그린다. 신발 한 짝에 대한 대우도 상당하다. 200호 정도의 대형 작품들에 그려진 신발짝에서는 존엄성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받은 포도와 쟁반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김혜련의 작은 찻잔은 파주 헤이리의 축복받은 그릇이다. 그처럼 아프게 맞으며 절절한 애무의 붓질을 입은 그릇이기에, 그리고 이렇게 슬픈 색채와 화난 못질을 받은 그릇은 또 없기에.

 

김혜련 회화의 모티프(motif)는 그것이 신발이든, 사과든, 포도든, 또 그릇이든 상관없이 중요하다. 이번 전시의 주된 오브제인 작고 하얀 찻잔은 그 단아한 한국의 전통 다기의 제한적 용도를 벗고서, 제기(祭器)이고, 배이고 또 최근 작가가 본 백제관음이고 또 소우주가 된다. 그래서 이 잔이 완전한 그릇이다. 하나의 그릇이 완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릇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함이란, 범주를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한 법. 이 작은 도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천하무적(all mighty) 그릇이다. 그 사물이 그림면으로 드러나며 그 실체를 드러낸다. ‘탈은폐(disconcealment)’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이 필요한 순간이다. 심연(深淵)에서 화면(畵面)으로 부상하는 순간, 비가시(the invisibility)의 덩어리에서 가시(the visible)의 표면으로 전환되는 생성의 모습이 김혜련의 회화에 응결돼 있다.

 

소위 예술가란 오브제 하나를 남보다 심각하게 바라보고 그 존재의 비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작은 움직임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당연한 스러짐에 망연해 하고 의례적인 아픔에 상처받는 그런 이들이다. 일상의 사물이 느닷없이 다르게 보일 때, 평범한 생활의 한 순간이 충격으로 다가올 때 작품의 모티프를 얻는다. 예술가란 존재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시하려는 자라는 작가의 말을 기억한다. 그는 또한 붓질에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회화라 일컬으며 그 마음이 어떠한지 알아채는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을 기다린다 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런 눈을 가진 자는 김혜련 회화가 지닌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환희를 볼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예술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요즘같이 이미지 관리에 영민한 작가들이 다수인 사회에서, ‘까다롭다거나 괴짜라 불리는 이런 부류를 찾아내기란 드문 일이다. 그런 뜻에서 김혜련은 희귀종이다. 신경질적으로 예민하고, 엉뚱하게 즐거운 작가이다. 작업이 작가를 닮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김혜련의 경우는 그 작업과 작가의 닮은꼴에 절로 웃음이 난다. 다음 순간 어디로 지 알 수 없고 또 어느 규정된 범주에 넣기에 부적절한 건, 작업이나 작가나 매 한가지이다. 작업이 어찌나 천방지축인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예측 불가한 작가의 묘한 매력을 쏙 빼닮아 있다. 포도 씨를 바르다가도 포도알 속 섬유질의 힘줄에서 생명력을 느껴 놀래고, 먹고 남은 앙상한 줄기에서 순환되는 자연의 에너지를 생각하고 전율하는 이.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김혜련의 작업은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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